삼별초 영웅 배중손 장군
정 충 사
삼별초 영웅 裵仲孫(배중손) 장군
장군의 사당 정충사(精忠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30
고려 1270년(원종 11년)에 몽골 침략에 대항하여 자주국방. 자유독립을 외치며 저항한 삼별초항쟁(三別抄抗爭)의 지도자 배중손(裵仲孫) 장군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祠堂)이다.
전에 있던 사당은 오래되어 낡았을 뿐만 아니라 규모가 작고 협소하여 장군의 자주정신과 위국충절(爲國忠節) 정신을 배씨 문중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높이 받들어야 한다는 취지로 전라남도 도비와 진도군 군비로 사당을 1999년 10월 16일 건축하여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배중손 장군은 삼별초를 이끌고 고려시대 몽골 침략에 대항하여 강화도에서 조국수호, 자주국방, 민족보호라는 절대 절명에 따라 항몽 항쟁을 벌렸고, 진도로 이전하여 국난극복의 거룩한 항몽 역사를 이룩하였던 위대한 덕장이다.
당시 고려는 미증유의 대전란으로 근 40여 년에 걸쳐 전국 국토가 몽골 기마병들에게 짓밟혀 초토화되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당하는 엄청난 재난을 당하였다.
중손 장군은 고려의 수호신으로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는 역사의 인물이며, 정충사는 우리 경주 배문의 제3 성지이다.
진도군은 선현의 호국정신을 선양하고 후손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새로운 관광명소로 개발하는 한편 사당과 배중손 장군 동상은 진도에서 보존 관리한다.
중손 장군 항몽 순의비 <전문>
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 최남단 호남의 보배로운 고장 진도(珍島)는 풍광이 빼어나 예부터 시인묵객(詩人墨客)이 대대로 이어온 기름진 땅과 각종 해산물이 풍부한 살기좋은 곳으로 국토를 외적으로부터 지켜온 방파제요, 또 앞날의 무한한 발전을 기약하는 해양대국(海洋大國)의 전초기지이기도 하다.
바로 이 역사의 땅 진도에 혼(魂)을 불어 넣어준 배중손(裵仲孫) 장군(將軍)과 그가 영도하였던 삼별초(三別抄) 정신이었으나, 길가에 핀 패랭이꽃같이 끈질긴 생명력, 부정(不正)에 끝까지 항거하는 의리(義理)정신, 외적으로부터 조국의 자주를 지키고자 생명을 초개처럼 버린 충절(忠節)이 곧 그것이다.
장군과 그를 따른 삼별초와 진도 백성들이 抗蒙(항몽) 전쟁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이래 수백년간 난적의 누명을 받았으나 그 혼을 이어온 순박한 진도 사람들은 사당을지어 수호신으로 오늘날까지 받들어 오고 있다.
일찍이 고구려(高句麗)의 뒤를 이어 자주를 기치로 내세웠던 고려왕조(高麗王朝)에는 외적의 침입과 그 항전(抗戰)이 끊이지 않았으나 거란을 방어한 강감찬(姜邯贊), 여진을 물리치고 국경을 개척한 윤관(尹瓘), 대몽 항전에서의 배중손(裵仲孫), 明의 야욕을 무찌르고자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던 최영(崔瑩) 장군 등이 그 항전의 주역이었다.
이들의 뜻은 모두 같았으나 성과는 각기 달랐으니 民軍이 서로 일치하였을 때, 청사에 빛나는 위훈을 세웠고 분열되었을 때 나라는 외적에게 짓밟혀 몸을 잃었으며, 반역으로 누명을 쓰고 벗지 못하는 천추의 恨(한)을 떠안게 되었다.
고려는 동양과 유럽 일대를 제패한 몽골 제국의 침략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항하고자 강화(江華)로 천도(1232년)하여 항전한 40여 년간 천하를 정복한 元 세조 쿠빌라이의 위력도 애국과 자주충절의 화신인 고려군(高麗軍)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정권욕에 눈이 먼 유약한 고려 왕실과 그를 따르는 일부 문인들이 육지로 나가 스스로 적에게 머리 숙여 굴종하였고, 나라와 그들을 지켜주었던 삼별초(三別抄)에게 해산령을 내렸다. (元宗14년, 1270년)
이에 애국과 충의에 불탄 삼별초 배중손 장군(裵仲孫 將軍)은 분연히 일어나 몽골의 앞잡이로 전락한 왕권에 대항하고자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임금으로 추대(1270년 6월)하였고, 새로운 전열을 가다듬고 앞날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1천여척의 배로 江都(강도)에서 진도(珍島)로 옮겨 용장산성에 터를 잡아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 자주적 신왕조(新王朝)에 전라도와 경상도 백성들이 지지하고 개경의 관노들까지 호응하였다. 같은 해 11월말 탐라(제주)를 정복하니 해상은 물론 전주, 나주등 내륙과 경상도 연안의 남해, 거제, 합포, 동래, 김해 등이 그 세력권에 들었다.
개경 고려왕실은 이를 토벌하고자 麗蒙(려몽) 연합군을 편성(고려 김방경金方慶, 몽골 아해阿海‧ 근도伒都)하여 수차례 공격하였으나 배중손 장군(裵仲孫 將軍) 휘하의 삼별초와 진도 백성들의 굳은 방어에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元 세조는 홍다병(洪茶兵)에게 대병을 이끌고 출병하게 하고, 김방경과 혼도의 연합군과 합세하여 진격하여 왔다.
중과부적으로 방어가 곤란하고 온 왕마저 죽음을 당하자 裵仲孫 장군은 최후 결전을 위해 一軍을 탐라로 보내 후일을 기 약하게 하고 자신은 여몽 연합군을 유인하여 굴포리에서 결전하다가 장렬한 전사를 하니 그 휘하의 군사들도 모두 붉은 피를 흘렸다.(1271년 음력 5월 15일)
또 여인들은 이리 떼 같은 몽골군으로부터 정절을 지키고자 궁녀둠방에 몸을 던졌고, 노약자 1만여 명은 포로가 되는 참극을 빚었으니 진도의 산천은 울고 하늘의 해는 빛을 잃었도다. 탐라로 간 부대는 김통정金通精 장군의 지휘하에서 1273년 4월까지 항전하다 모두 장렬한 죽음으로 끝맺었다.
배중손 장군과 그를 따른 삼별초와 진도 백성들의 40여 년 대몽 자주 항전은 고려 무인들의 정화(精華)로써 굴종의 비굴함보다 자주를 위해 장렬한 전사를 택하였으니 대장부로서 능사필(能事畢)한 것이요,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모범으로서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장절(壯節)인 것이다.
1999년 배문의 후손들이 건립한 동상을 보아라, 나라를 위한 정충(精忠)으로 국가의 독립과 자주성을 지키고자 진력하였건만 나라도 장군을 버린 것이다. 이에 장군은 손을 높이 들어 하늘을 향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원한을 포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군이 남기신 자주정신은 하늘도 알고 오늘에 이르도록 찬란히 빛나오며 진도를 지켜준 수호신으로 진도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된 것이다.
그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단 12척의 고군(孤軍)으로 왜(倭)의 대군을 무찔러 나라를 지킨 노량대첩(1597년 9월 16일)의 저력이 되었으며, 배중손 장군을 비롯하여 당시에 순국한 民軍들의 의기와 천추의 회한은 거센 파도가 되어 지금까지 포효하며 외적의 접근을 막고 있으나, 무심히 지나가는 행인들만이 모두 그를 잊고 있음이다.
아! 동백꽃보다 붉었던 忠節(충절)이여, 파도보다 굳센 항쟁력이었으며, 自主性을 지키다 순절한 넋이여 민족의 앞날을 밝힌 燈臺(등대)였으나 꿈꾸시던 장군의 해상왕국이여 珍島(진도)가 그 母港(모항)이 되리라.
장군께서 염려하시고 회한하셨던 이 조국은 끼치신 정신을 받들어 세계 일등국으로 발돋움하여 탄탄대로를 걷고 있사오니 이제 그날의 노여움을 푸시며 앞날의 航程(항정)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주소서!
오늘 세계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여 가는 우리 후손들에게 남기신 가르침이 더욱 간절하여 殉義(순의)하신 장군과 그 民軍들을 위하여 이 碑(비)를 세워 장군의 호국 정신을 되새기며 머리 숙여 英靈(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東國大學校 名譽敎授
文學博士 裵相賢 謹撰(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