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裵楔)의 字는 중한(仲閑)이며 호는 서강(西岡)이다. 明宗 辛亥(1551년)에 부친 서암(書巖) 배덕문(裵德文)과 모친 善山 白氏 사이에서 長男으로 星州牧 內西面 今巴谷坊 後浦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칠봉(七峰) 김희삼(金希參)에게 수학하였는데 용력이 출중하고 문장에 능하였고, 국량이 과인(過人)하여 칭송을 받았다. (경산지. 서강 장군 신도비) 10여 세에 당시 울산 군수였던 부친을 따라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병마절도사 장필무가 장수의 재목을 알아보고 권하여 붓을 던지고 무인의 길로 들어섰다. (경산지. 서강 장군 신도비) 선조 16년(1583) 31세에 무과(武科) 별시에 급제하고 변방(邊方)에서 세운 공으로 전생서(典牲暑) 주부(主簿)로 승진했다. (경산지. 정만록)
배 설(裵 楔) 장군의 13척 배로 명량대첩 승리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전승에 일등공신
다음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원균의 모함으로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석방된 뒤 백의종군으로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대승을 거두어 7년 전화(戰禍)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던 배설(裵楔) 장군의 전사(戰史)를 발췌 요약한 글이다. 편집자 주
배설(裵楔 ; 1551-1599년) 장군은 성산성주 후손으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덕문(德文)의아들이다. 무과에 합격한 뒤 합천군수, 밀양부사, 선산부사, 경상우수사를 지내셨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 정벌에 참여 하였다. 조경이 황간 ·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 왜적과 대항하였다. 그 뒤 합천군수가 되었는데, 그때 의병장 김면(金沔)이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할 것을 요청했으나, 조정에서 이를 무시해 아군이 크게 불리하였다.
부산첨사 ·진주목사 ·밀양부사를 거쳐 선산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 1597년 다시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선 600여 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자, 통제사 원균((元均)이 한산도 본영에서 배설에게 수백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였다.
배설 장군은 웅천을 급습해 잘 싸웠으나,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군량 200석, 전함 수십 척을 상실 하였다. 칠천해전(漆川海戰)의 초반적인 7월 14-15일 싸움에서 패한 뒤, 7월 15일 저녁에 원균이 여러 장수를 소집해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으나, 배설 장군은 전세가 불리함을 짐작하고 장래 나라를 위하여 비밀리에 퇴각할 것을 모의하였다.
7월 16일 적의 대 선단이 원균의 주력 부대를 공격해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당시 기록을 보면 원균이 먼저 도망치고 남겨진 이억기들은 싸우다 전사한 후에 배설 장군이 남은 거북선 12척 배를 수집해 물러난 것이다. 배설 장군은 전세를 관망하다 원균의 명령을 듣지 않고 12척을 이끌고 일단 도피하였다. 한산도로 도피한 후 군사 시설 및 양곡 ·군기와 군용 자재를 불태우고 남아 있던 백성들을 피난시켰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백의종군하다가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는 아군은 배설 장군의 12척 거북선 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결정적인 거북선 13척배설 장군의 보전한 거북선 12척+이순신 장군이 1척을 더해 13척이라는 기록도 있음으로 이순신 장군을 도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판옥선을 기반삼아 그 이름도 찬란한 통쾌한 대승(大勝), 세계 해전사상 그 유래를 찾기 힘든 명량대첩을 창출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이순신 장군은 배설 장군의 보전한 거북선 13척으로 왜군 133척을 무찌르고 격파하였다. 이에는 폭 294m의 좁은 바다 울돌목(진도대교 아래)의 바닷물 흐름을 잘 이용하여 불과 13척으로 10배가 넘는 왜선을 대파한 것이다.
배설 장군은 선조 32년(1599년) 향년 49세로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배설 장군의 13척의 배가 아니었다면 우리나라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배설 장군께서 13척을 도피시킬 때 일부에서는 설왕설래 말들이 있었다지만, 결론적으로 왜군을 무찌르는데 13척이야말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면서 왜적의 기을 무참하게 꺾어버려 임진왜란의 종전(終戰)을 이끌어낸 초석이 되었음을 우리 裵 氏 명문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긍지를 가져야 한다.
그 뒤 배설 장군은 명량대첩의 무공이 인정되어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증손 석휘(碩徽)가 지은 <가범 家範>에 시조 2수가 전하는데, 선조 때의 시조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조선 시조문학사상 그 의의가 인정된다.
명량대첩 (1597년 9월 16일) ,(김포종친회 회장)裵 榮 珉
경상우수사 서강 배설 장군 신도비
서강(西岡)배설(裵楔)신도비(神道碑)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194-4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무관 배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1954년에 후손들이 세운 비이다.
임진왜란 당시 무장인 배설(1551~1599)의 자는 중한(仲閑),호는 서강(西岡),본향은 성산(星山)이다.
아버지는영덕군수,고부군수를 역임하고 의병장으로 활약한 배덕문(裵德文)이다.부인은 정부인(貞夫人)야성송씨(冶城宋氏)로 장인은 좌의정 송렴의6대손인 충순위 송원이다. 1583년(선조16)별시 무과에 합격하여 전생서주부(전생서:궁중의 제항,빈례 등 의식에 필요한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았던 관서)를 지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향병을 규합하고 왜적에 대항하여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경상우수사가 되어 웅천 전투에 참여하였다.칠천량(漆川梁)해전 때 함대의 퇴각과 한산도에서 군사 시설 및 양곡,군용 자재를 불태우고 백성들을 피신시켰으나,칠천량 패전의 책임과 반역 모의라는 죄목으로1599년3월 처형당했다.그러나 후일 그의 공적이 인정되어1610년(광해군2)선무원종공신1등에 책록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1873년(고종10)에는 유림의 소청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병조판서 겸 지의금부 훈련원사로 추가로 증직되었다.
모함에 의해 모반죄로 순절하다. (1598년 12월 26일)
전쟁이 끝나가던 무렵 이순신(李舜臣)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던 1597년 11월 19일 서인(북인) 정권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 수습을 위한 전쟁 책임을 동인 진영에 돌려 동인의 영수격인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한 다음 전쟁이 끝나자 7년 전쟁에서 살아남은 최고위 장수 배설(裵楔)에 대해,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은 ‘배설(裵楔)이 무뢰배를 모아서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이 있다고 모함(謀陷)하여 체포하게 했다. (선조실록)
영남 유림들의 항의 상소
배설(裵楔)이 모함(謀陷)에 의한 순절(殉節) 직후 석 달간 병조판서(兵曹判書) 홍여순(洪汝諄)을 탄핵(彈劾)하는 장계가 수도 없이 올라왔고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 확인된 것만도 99회였다. 홍여순은 진도로 귀양을 가고 거기서 죽는다. (선조실록).